61. 봉화 청량산 / 2017.8.26. / 산타모니카 산행이야기(71)
100대명산 61차 봉화 청량산
퇴계선생이 극찬했던 선계
오늘의 야생화 며느리밥풀, 짚신나물
산행기록
○ 일시 : 2017.8.26 10:00 ~ 15:30
○ 장소 : 봉화 청량산
○ 참석 : 1인
○ 높이 : 청량산 870 / 누적고도 800m추정
○ 거리 : 7.0km
○ 시간 : 5.5시간 / 이동시간 4시간
○ 코스 : 선학정 - 청량사 - 두실고개 - 자란봉 - 하늘다리 - 선학봉 - 청량산(장인봉) - 선학봉 - 하늘다리 - 자란봉 - 연적봉 - 탁필봉 - 자소봉 - 김생굴 - 자소봉 - 김생굴 - 산꾼의집 - 선학정
○ 배지 : 청량산
○ 특이사항 : 여름날 암릉산행
< 청량산(淸凉山) >
높이 870m로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덕산지맥 청량단맥에 속하는 산으로, 산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다. 1982년 8월 봉화군과 안동군 일대 48.76㎢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으며 2007년 3월 13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금탑봉·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밀성대·풍형대·학소대·금가대·원효대·반야대·만월대·자비대·청풍대·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층이 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외 편암과 사암 등 다양한 지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약 1억 년 전에는 호수나 바다로 추정되며 그 증거로 퇴적암 지층에서 다수의 자갈과 모래가 발견된다.
산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청량사 유리보전에는 약사불을 모시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리고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등 역사적인 유적지도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화 청량산 [Cheongnyangsan Mountain, Bonghwa, 奉化 淸凉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청량산 노인봉 정상표지석

청량산 산행지도

선학정. 청량사 입구로 산행들머리를 결정합니다

청량산 산행안내도

퇴계선생의 시비

퇴계선생의 싯귀입니다

선학정에서 시작

청량산과 하늘다리

청량사 출렁다리

주세붕선생의 시비

물봉선도 보입니다

사찰 오름길 계곡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청량사를 오릅니다

장구채인가?

봉우리들이 이런 정도네요. 금탑봉 이었습니다

반그늘속의 오름길

산꾼들의 집이라 쓰여 있습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한 청량사의 모습
<청량산>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청량산 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암봉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며,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청량사가 내청량이라면 응진전은 외청량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본시 매우 큰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유산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했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공민왕이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 있는데, 지금은 금칠을 했다. 절이 있는 청량산에는 김생(金生)이 공부하던 김생굴과 공민왕당, 퇴계 이황이 즐겨 머물며 수학하던 정자 오산당이 있다. 본전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주변에 청량산도립공원, 고산정, 도산서원, 석빙고, 안동호, 봉정사, 일월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량사 [淸凉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청량사 설명판

청량사는

1톤차도 올라오고

청량수 바가지도 다정하게

원효가 다녀간 길

유리보전

청량사의 랜드마크 청량사 5층석탑

그냥 작품

반가유사유상

노송과 5층석탑 그리고 축융봉

세상 뭐 별거 있나?

지장전 뒤로 연화봉

이제 본격적인 산행길 하늘다리로

뒷실고개에 도착

이황에 꿈에 청량산에 노닐면서

하늘다리. 2008년 5월 완공된 90m의 국내 최장 구름다리였으나 요즘은 한참 밀려서...그러나 아찔함은 그 어느곳 못지 않았습니다. 해발 800m 지점의 선학봉(826m)과 자란봉(806m)을 연결하는 산악형 현수교량(길이 90m)이다.

근접

청량산 출렁다리 설명판

하늘다리 건너는 중

반대편에서

갈림길

정상인 노인봉에 도착

철량산 정상 장인봉. 김생의 글씨랍니다

청량산 장인봉 정상(뒷면) 주세봉 선생의 정상의 올라 싯귀가 보입니다.
登淸凉頂(등청량정)
- 周世鵬(주세붕) -
我登淸凉頂(아등청량정)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兩手擎靑天(양수경청천)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白日頂臨頭(백일정림두)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銀漢流耳邊(은한류이변)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俯視大瀛海(부시대영해)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有懷何綿綿(유회하면면) 감회가 끝이 없구나.
更思駕黃鶴(갱사가황학) 다시 황학을 타고
遊向三山顚 (유향삼산전)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가야할 자소봉 탁필봉 암봉들...

에구 나의 소중한 동행물품

건너편 축융봉

다시금 하늘다리

돌기둥으로 이루어진듯한 봉우리들

연적봉에서 본 장인봉과 선학봉 하늘다리 자란봉 능선

연적봉

연적봉에서 한컷

우리나라 장가계가 여기 있네요 탁필봉과 자소봉

탁필봉 정상표지석

자소봉 가는길에

자소봉 정상표지석

정상부

갑자기 부드러운 표지판이

김생이 10년간 수도 했다는 김생굴입니다. 10여명이 머무룰수 있는 공간이 있네요
<김생굴>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산 경일봉과 금탑봉 중간에 자리한 굴로,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연마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한 청량산(870m) 경일봉(801m)과 금탑봉(646m) 중간에 있다. 굴속은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10년간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전해진다. 김생의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이다. 한평생 서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으며,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뛰어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량산 김생굴 [淸凉山金生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김생굴

김생굴 설명판

돌덧널무덤도 있네요

청량사의 모습

하산길

청량사 입구까지 하산

뒤돌아본 봉우리

인공이지만 청량폭포(펌). 상부 암반위의 푸른 소나무가 경이롭습니다
<청량폭포>
청량폭포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에 있다. 청량산 등산 코스 가운데 3코스를 택하면 청량폭포에 닿는다. 청량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1982년에 경상북도립공원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특히 2007년 3월에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3호로 지정되어 학술적, 경관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량폭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한모금만 마셔도 총명해진다는 총명수(약수). 최치원이 총명수를 마셨다 전함

풍혈대(風穴臺)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한 청량산 금탑봉(646m) 중간에 있다. 요초대(瑤草臺) 뒷면에 있다. 층암절벽이 남북으로 통하여 여름철에도 늘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이다. 그 중간에서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책을 읽고 바둑을 두었다고 전한다.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기초를 잡아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풍혈대 [風穴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는길 도산서원에 들러봅니다
<도산서원>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693년(숙종 19)에 이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권득기(1570~1622)와 그의 아들이 권시(1604~16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1711년(숙종 37)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원래 사우(祠宇) 3칸, 묘문(廟門) 3칸, 강당(講堂) 4칸, 서재(西齋) 3칸, 남재(南齋) 3칸, 전사청(典祀廳) 3칸 등 모두 23칸 규모였다.
만회(晩悔) 권득기는 4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으나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도학(道學)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낸 절개가 굳은 선비였다. 그 아들인 탄옹(炭翁) 권시 또한 높은 학행(學行)으로 대군사부, 한성부좌윤 등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낙향하여 탄방동에 서원을 짓고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에 더욱 정진하였다. 도산(道山)이라는 지명도 그가 이곳에 정착하여 도학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었으나 1921년에 다시 단(壇)을 조성하고 제향을 계속하여 오다가 1968년과 1973년 2차례에 걸쳐 안동권씨 종중에서 전체를 복원하였다. 정문인 향직문(向直門)과 내삼문(內三門), 함덕사(涵德祠), 명교당(明敎堂), 시습재(時習齋), 지선재(止善齋),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수호사(守護舍) 등으로 유지되다가 1987년 숭모각(崇募閣)이라는 장판고를 증축하였다.
사우인 함덕사에는 권득기와 권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명교당은 유생들의 학업을 위한 회합장소, 시습재와 지선재는 제관들의 제향을 위한 숙소와 회합장소, 수호사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庫直)의 주거용으로 각각 사용되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 제향하며 《독서잠의(讀書潛疑)》10권, 《만회집(晩悔集)》《탄옹집(炭翁集)》 등의 문집 10여 권이 있고 숭모각에 만회집탄옹문집 판목(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산서원 [道山書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랜 고목이 세월을 말해줍니다

내부모습

하천 건너의 시사단(지방 별과를 보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