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우중의 산행
오늘의 야생화 참나리 사위질빵 영아자 파리풀 원추리
○ 일시 : 2024.7.27. 12:26 ~ 14:33
○ 장소 : 진천 두타산
○ 참석 : 1인
○ 높이 : 두타산 598m / 누적고도 446m
○ 거리 : 4.3km
○ 시간 : 2.1시간 / 이동시간 3시간
○ 배지 : 두타산
○ 코스 : 영수사 - 능선 - 두타산(회귀)
○ 특이사항 : 폭염과 우중산행
높이는 598m로, 두태산으로도 불린다. 진천군의 동쪽 방향으로 10㎞ 지점에 있다.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고 영수암을 산자락에 품고 있는 명산이다.
영수암은 진천군의 상산팔경 중의 하나이다. 918년(태조 원년) 중통국사가 창건한 절로, 초평면 영구리의 절 뒤편에 영천(靈泉)이 있어서 영수사(靈水寺)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대웅전 앞의 3층석탑과 진천 영수암 괘불(충북유형문화유산 44)이 있다. 영수사 옆에는 계곡이 흐르는데, 물이 오염되지 않아 바로 떠 마셔도 된다.
두타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민족의 시조 단군이 팽우에게 높은 산과 냇물 등 산천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비가 날마다 내렸고, 산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이때 팽우가 이 산에 머물자, 산꼭대기가 섬처럼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 두(頭) 섬 타(陀)를 써서 두타산이라 하였다.
정상에는 삼국시대의 석성이 있고 부근에는 황금색 갈대밭이 우거져 있다. 산성의 규모는 높이 1.2m, 너비 2.7m, 성 둘레 약 1km 이다. 성터에는 돌무더기가 오랜 비바람에 검게 변화되어 있고, 안에는 성재(聖裁)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두 개의 우물 터가 있다. 신라시대의 장군 실죽이 백제군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기와조각 등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타산 [頭陀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두타산 정상표지석
두타산 등산지도
영수사 일주문
영수사의 모습
천년고찰 영수사 주차장
영수사
태조원년 819년 영통대사가 창건했다고
<영수사>
진천의 두타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의 말사이다. 오랜 기간 '영수암(靈水庵)'이라고 불렸으나 1980년대 이후 사찰 규모를 확장하면서 '영수사(靈水寺)'의 명칭을 회복하였다.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과 진천군지(鎭川郡誌)인 ≪상산지(常山誌)≫ 등에는 절 뒤에 영천(靈泉)이 있어서 ‘영수사(靈水寺)’라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며 ≪조선환여승람≫ 등에는 “삼한시대의 고찰”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1831년(순조 31) 이진영(李晉榮)이 쓴 ‘영수사 중수기(靈水寺重修記)’에도 사찰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쇠락했던 사찰을 묘익(妙益)이라는 승려가 선사(先師)인 법장(法章)의 유지(遺志)를 이어서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3년 절에서 작성한 ‘창건역대(創建歷代)’라는 기록에서는 고려 태조 원년인 918년에 태조의 아들인 중통국사(證通國師)가 창건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918년에 고려 정종(定宗, 923~949), 광종(光宗, 925~975)의 친동생인 증통국사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므로 이러한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1831년 묘익이 중수한 후에도 영수사는 여러 차례 중수와 중건(重建)을 거쳤으며, 특히 1980년대 이후 사찰 규모를 크게 확장하였다. 오늘날 영수사에는 1653년(효종 4)에 제작된 영산회괘불화(靈山會掛佛畵)가 전해지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괘불화(掛佛畵)는 2008년 3월 12일에 보물 제155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양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 불화는 원래 진천 상계리의 백련암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매년 석가탄신일에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또한 영수사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후불탱화 등 조선 후기의 불교문화 양식을 알려주는 유물들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수사 [靈水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진천 영수사 회괘불탱
진천영수사 회괘불탱 안내판
으아리
사차일 주위로 참나리가 참 많아요
< 참나리 >
산과 들에서 자라고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한다. 비늘줄기는 흰색이고 지름 5∼8cm의 둥근 모양이며 밑에서 뿌리가 나온다. 줄기는 높이가 1∼2m이고 검은빛이 도는 자주색 점이 빽빽이 있으며 어릴 때는 흰색의 거미줄 같은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길이 5∼18cm의 바소꼴이며 녹색이고 두터우며 밑 부분에 짙은 갈색의 주아(珠芽)가 달린다.
꽃은 7∼8월에 피고 노란빛이 도는 붉은 색 바탕에 검은빛이 도는 자주색 점이 많으며 지름이 10∼12cm이고 4∼20개가 밑을 향하여 달린다. 화피 조각은 6개이고 바소꼴이며 뒤로 심하게 말린다. 밀구(蜜溝)에 털이 있고, 6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길게 꽃 밖으로 나오며, 꽃밥은 짙은 붉은빛을 띤 갈색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과 줄기 사이에 있는 주아가 땅에 떨어져 발아한다. 한방에서 비늘줄기를 약재로 쓰는데, 진해·강장 효과가 있고, 백혈구감소증에 효과가 있으며, 진정 작용·항알레르기 작용이 있다. 한국·일본·중국·사할린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나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끼계곡을 보는듯
폭염속 바람한점 없는 계곡길을 오릅니다
임도가 끝나는곳
능선부에 도착
원추리가 피기시작
두타산성이 보입니다
<두타산성>
해발 598.3m의 두타산 정상부에 만들어진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정상부의 산성은 대부분 붕괴되어 원형을 잃어버렸으며 남쪽에 석축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동쪽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였고 북서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산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산성으로서 기능은 상실한 것으로 보이며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천현의 동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장군인 실직이 이곳에 산성을 축성하였고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타산성 [頭陀山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정상부의 모습 여전 세상이 물에 잠길때 정상부가 머리만큼만 남았다하여 두타산
진천 두타산에 서서
정상표지석이 3개
기구한 세월을 이야기해주는 소나무
정상부의 정자
또다른 전망대. 비피할 자리가 없다. 하산한다
초평면 소재지 모습
참나리 인증샷
파리풀
진천 초평호 주변둘레길
진천농다리
문백면 구산동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고려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직사각형 돌을 길이 93m, 폭 3.6m의 물고기 뼈 모양으로 쌓았다.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선조의 지혜가 담긴 돌다리를 건너면 미르숲에 들어가는데 봄철이면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한다. 농다리 바로 옆에는 현대에 놓은 돌다리와 인공 폭포가 있다. 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 것도 추천한다. (농민신문)
한반도지형
진천의 대표 관광명소는 초평저수지다. 저수지에서 직접 물고기를 낚는 것도 재미있지만, 낚시에 흥미가 없다면 초평저수지를 공중에서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초평리 두타산 정상엔 초평저수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의 특징이라면 물길이 화산리를 휘감아 흐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 한반도를 닮았다는 것. 공원까지는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걸어가는 것도 좋다. 길이 잘 정비된 데다 가는 길에 개나리·진달래 등이 활짝 피어 있다. (농민신문)
초평호 미르309 출렁다리
진천군이 50여억원을 들여 2024년 4월12일 개장한 용의 다리 ‘미르 309’도 있다. ‘미르’는 용을 뜻하는 우리말이고, 309는 길이 309m를 뜻한다. ‘미르 109’는 전국에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국내 최장 무주탑 현수교다. 대개 다리는 주탑을 설치하고, 다리 중앙에 교각을 세워 출렁다리를 연결하는 형식으로 만드는데 ‘초평호 미르 309’는 주탑이 없다. 같은 형식의 기존 국내 최장 다리는 울산 동구 대왕암 출렁다리로 303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