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날씨
오늘의 야생화 미역취 참취 구절초
○ 일시 : 2022.10.1 11:24 ~ 14:31
○ 장소 : 천안 아산 광덕산
○ 참석 : 1인
○ 높이 : 광덕산 699m / 누적고도 577m
○ 거리 : 7.4km
○ 시간 : 3.1시간(휴식시간 0.2시간) / 이동시간 2.5시간
○ 배지 : 광덕산
○ 코스 : 광덕사 - 팔각정쉼터 - 헬기장 - 정상 - 장군바위 - 헬기장 - 부용묘근처 - 광덕사
○ 특이사항 : 초여름 날씨의 산행
높이는 699m이다. 아산시 송악면과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의 경계에 있는 천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 하였다. 명산으로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광덕산 부근에서 생산한 호두는 껍질이 얇고 알이 꽉 차서 천안시의 대표적인 명산물이다.
산에는 광덕사, 잣나무 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의 볼거리가 많다. 광덕사에는 고려사경(보물 390)·광덕사 대웅전(충남문화유산자료 246)·광덕사 삼층석탑(충남유형문화유산 120)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이밖에도 호도나무 전래비와 조선시대 기생 김부용의 묘가 있다.
주변에는 아산 현충사와 온양 민속박물관이 있어 둘러볼 만하다. 천안에서 풍세면과 광덕면을 지나 약 20분 정도 달리면 광덕사 주차장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덕산 [廣德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광덕산 정상표지석
광덕산 지도
가는길에 마곡사에 들릅니다
<마곡사 어원>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화산 마곡사 [泰華山 麻谷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다
해탈문
마곡사 5층석탑(보물799호)와 대광보전(보물802호)
<마곡사>
태화산 마곡사(麻谷寺)는 640년(백제 무왕 41)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1851년에 쓰여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는 "초창은 자장이요, 재건은 보조(체징體澄)이며, 3건은 범일(梵日)이요, 4건은 도선(道詵)이며, 5건은 학순이다"라고 한국 불교사상 고명한 승려들의 연관설을 싣고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등 신빙성이 약하다. 삼국 말기, 백제와 신라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백제의 핵심부에 신라의 승려인 자장이 창건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1199년에 불일 보조국사가 폐허화된 마곡사를 중수할 명을 받고 재건했다는 기록 정도가 믿을 만하다고 보인다.
마곡사에 현존하는 유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오층석탑으로 이는 13세기 몽골 간섭기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며, 그 이전에 사격을 갖춘 가람이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당시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등 불전과 승방들이 30여 동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현재의 전각들은 1650년 각순선사가 중수하고, 1782년 큰 화재가 일어난 이후 체규선사가 중건한 이후의 것들로 보인다. 마곡사의 가람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두 개의 가람이 공존하고 있는 형태이며,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일곽을 이루고, 북원은 대광보전(大光寶殿)을 중심으로 별도의 일곽을 이룬다.
전체 규모나 건물들의 크기로 보면 북쪽의 가람이 본절이고 입구 쪽의 영산전 일곽은 별도의 암자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북원의 입구인 해탈문(解脫門)이 남원 가람 앞에 세워져, 북원에 진입하려면 해탈문에서 개울을 건너 들어가야 하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주 마곡사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건축, 2004. 11. 30., 김봉렬)
자그만한 소원들이 모여있어요
마곡사 주변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십승지로 꼽을 만큼 대표적인 명승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도 피했으며, 한국전쟁 피해도 받지 않았다.
<김구와의 인연>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화산 마곡사 [泰華山 麻谷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덕산 주차장에 도착
광덕사 일주문
광덕면 특산물 광덕호두
광덕산 산행안내도
잘정비된 광덕사 입구
<광덕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마곡사는 그 산너머 남쪽에 자리한다. 652년(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金銀字)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恩重經)》 각 2부 등을 승려 진산(珍山)에게 주어 새 도량(道場)을 연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곳에 거동하였을 때 한계희(韓繼禧)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써 내렸는데, 위전(位田)를 바치고 각종 요역(徭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28방(房)에 부속암자가 약 89개, 9개의금당(金堂), 80칸의 만장각(萬藏閣), 3층으로 된 천불전(千佛殿)은 불교도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번창하여, 경기 ·충청 일대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는 대찰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려, 가까스로 대웅전 ·천불전만 중건되어 큰 절의 명맥만을 유지하였고, 1981년 대웅전 ·천불전 등을 신 ·증축하였다. 광덕사 고려사경(高麗寫經)인 보물 제390호 《금은자 법화경》(6책)과, 천불전의 대형 후불탱화 3점, 《금자사적기(金字事蹟記)》 《세조어첩(世祖御帖)》 등 문화유산이 있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안명로(安命老)가 쓴 이 《사적기》는, 이 절의 개창을 신라 흥덕왕 7년(832)으로 적고 있는데, 자장을 흥덕왕 때 사람으로 착각한 듯하다. 또 《태종실록》(28권)에 따르면, 1414년(태종 14) 가을에 왕명으로 《대반야경(大般若經)》(전부)을 일본의 승려 규도(奎籌)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덕사 [廣德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산행길이 깔끔
중간중간 쉼터도 보이고
산악인의 선서(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었다 합니다)
하염없는 오름길
시들어가는 참취도 힘을내어 웃어주고
때론 복병처럼 선바위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천남성도 익어갑니다
<천남성>
산지의 습지에서 자란다. 높이 15~50cm로 외대로 자라고 굵고 육질이다. 알줄기는 편평한 공 모양이며, 주위에 작은 알줄기가 2∼3개 달리고 윗부분에서 수염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줄기의 겉은 녹색이지만 때로는 자주색 반점이 있고 1개의 잎이 달리는데 5~11개의 작은잎으로 갈라진다. 그 작은잎은 달걀 모양의 바소꼴 또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바소꼴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꽃은 5∼7월에 피고 단성화이며, 포의 통부는 녹색이고 윗부분이 앞으로 구부러진다. 꽃대 상부가 곤봉 모양이나 회초리 모양으로 발달하는 것도 있다. 열매는 장과(漿果)로 옥수수처럼 달리고 10월에 붉은색으로 익는다.
알줄기는 거담·진경·소종·거풍 등의 효능이 있어 중풍·반신불수·상풍·종기 등에 사용한다. 유독성 식물이다. 한국·중국 동북부에 분포한다. 포가 자주색 또는 보라색이고 세로로 흰 줄이 있는 것을 남산천남성(var. violaceum), 작은잎에 톱니가 없고 포가 녹색인 것을 둥근잎천남성(var. typicum)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남성 [天南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드디어 광덕산 정상
아산시와 천안시가 상생 협력을 위해 세운비
천안 광덕산에 올라서
산정부의 코스모스
그늘속 틈틈이 식사들을
능선 갈림길
장군바위입니다
<장군바위>
천안시 동남구의 광덕면 광덕리 안산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장군이 투구를 쓰고 있는 모양이므로 장군바위 또는 장군암이라고 부른다. 망경산(望京山)과 광덕산(廣德山)의 중간이 된다. 이 장군바위에서 1.5㎞쯤 서남쪽 광덕산 능선에도 장군바위가 있으며, 그 북쪽 태학산의 해선암 마애불(海仙庵 磨崖佛)도 장군바위라 부르고 있으므로 혼동하기 쉽다. 안산 북쪽 장군바위는 서쪽 골짜기를 이마장골이라 부르는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 혁명 때 마을 주민 2만여 명이 이곳에 피난하였으므로 이만장이라 하던 것이 이마장이 되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군바위 [將軍-, Janggunbawi]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장군바위 설명판
건강한 숲의 모습
헬리포트
광덕사의 석불
광덕사 천불전
운초(雲楚)는 평북 성천(成川) 출신의 기녀로서 주옥같은 한시 300여 편을 남긴 여류시인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용(芙蓉)이며 운초는 호이다. 운초의 생존 연대와 행적에 대해서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운초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의 내용이나 단편적인 기록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김이양(金履陽)의 행적과 대조하면서 그녀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운초는 1800년경 평북 성천에서 태어났다. 원래 운초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그 고을에서는 뿌리가 있는 가문이었다. 운초는 1825년(을유년), 그녀의 나이 25살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5년 후인 1830년(경신년) 4월 16일에는 평북 귀성(龜城)에 갔다가 같은 해 겨울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도 왜 귀성에 갔었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831년에 운초는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김이양이 돌아간 후 운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 즉 시재가 뛰어난 몇몇 소실들과 서로 모여 시를 주고받으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용산에 위치하녀 한 눈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에 가끔 모여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시단((詩壇)과도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400년이 넘는 광덕사 호두나무
<광덕사 호두나무>
1998년 12월 2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유청신(柳淸臣:?~1329)이 원(元)에 갔다가 돌아올 때 호두나무 열매와 묘목을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에 심고, 열매는 자기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하나 분명하지 않다. 이후 현지에서는 이곳을 호두나무 시배지로 부른다.
높이 20m, 근원 둘레 4.38m, 나무 둘레 3.7m로,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한다. 지표로부터 90㎝ 위치에서 줄기가 동서로 갈라졌으며, 1997년 지표로부터 30㎝ 위치에서 길이 90㎝, 폭 45㎝의 크기로 수술하였다. 수관폭은 동서 2.2m, 남북 1.8m이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배워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비록 신분은 부곡(部曲)이지만 정3품의 대우를 받았으며, 고이부곡도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오잠(吳潛)과 함께 본국에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원나라에 건의하는 등 반역을 꾀하다 실패하자 9년간 원나라에 머물다가 죽었다.
광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652년(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1981년 대웅전·천불전 등을 신·증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天安 廣德寺 호두나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광덕사 하산길